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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탐방자료2

무너미 2010. 11. 22. 16:50

4. 궐내각사 영역과 경회루

편전 영역 뒤로는 임금과 왕비의 사적인 생활 공간인 내전, 즉 침전이 있다. 그러나 침전으로 가기 전에 먼저 경회루와 경복궁의 서쪽 영역인 궐내각사 영역을 돌아보는 것이 좋다. 편전 영역의 서쪽, 그러니까 천자고 바로 옆의 작은 문을 지나면 궐내각사 영역과 경회루가 나온다.

1) 궐내각사(闕內各司)
서쪽 영역으로 나가면 왼쪽으로 수정전 건물 하나만 달랑 서 있고, 수정전 너머 멀리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보인다. 지금은 이렇게 텅 빈 공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이 자리가 궁궐 내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 즉 궐내각사 자리인 것이다. 궐내각사에는 왕의 지척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관서와 궁궐을 호위하는 관서 그리고 궁궐을 유지 관리하는 데 필요한 관서들이 들어서 있었다.
우선 행정업무를 담당한 관서로는 신하들의 회의실 격인 빈청과 대청,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 역할을 하던 홍문관, 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담당하던 춘추관 등이 있었다. 궁궐 수비를 맡던 관청으로 오위도총부, 금군삼청 등이 있었으며, 궁궐을 유지하기 위한 관서로는 의약을 담당하던 내의원, 의복과 보물을 담당하던 상의원, 옥쇄와 마패 등을 관리하던 상서원 등이 있었다. 당시에는 수정전 주위로 빼곡히 관청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많던 궐내각사의 관청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 하나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2) 수정전(修政殿)과 영추문(迎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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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수정전]

수정전(修政殿)은 궐내각사의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쓰였고, 세조 때는 예문관으로 쓰였다고 한다.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한 뒤로는 침소나 편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894년 갑오경장 때는 군국기무처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듯 다양하게 쓰였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시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 이 건물에서 우리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건물이지만 수정전 역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고 고종 때 새로 중건했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문으로,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주로 이용하던 문이다. 현재의 영추문은 1975년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에 석축 대신 콘크리트로 복원을 해 놓은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석축으로 바로잡아야 할 문이다.

3) 경회루(慶會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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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경회루]

궐내각사 영역의 북쪽에 크고 웅장한 경회루가 있다. 경회루(慶會樓)는 사각형의 넓은 연못에 들어선 거대한 이층누각이다. 이 연못을 보통 방지(方池)라 부르는데 이 연못의 고유명사는 아니고, 사각형의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 방지의 동쪽 귀퉁이에 경회루가 있다. 경회루(慶會樓)는 ‘경사스러운 만남’이라는 이름 그대로 연회장으로 쓰이던 누각이다.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나 조정 대신들과의 연회가 이곳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경복궁이 처음 창건될 때는 작은 연못에 지나지 않았는데 태종이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위해 지금처럼 연못을 넓히고 웅장한 경회루를 만들었다. 태종 때는 돌기둥에 용을 새겨 물에 비친 용 조각이 우아했다고 하나 고종 때 복원하면서 지금처럼 사각형의 기둥으로 바뀌었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누각을 올렸다. 석축으로 섬을 만들고 그 위에 경회루를 세운 것이다. 석축 둘레에는 돌난간을 두르고 모서리 난간(문로주, 엄지기둥이라고도 함)에는 해태와 불가사리 등 상상의 동물들과 12지신상을 조각해 올려놓았다. 경회루의 1층은 높은 주춧돌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은 마루를 깔아 연회장소로 사용했다. 경회루는 세 개의 석교로 연못 외부와 연결되는데, 맨앞(남쪽)에 있는 다리가 나머지 두 개의 다리보다 넓다. 이 넓은 다리의 가운데에 어도를 두어 임금이 다니는 길을 만들었다.

5. 침전 영역

경회루를 본 다음에는 침전으로 간다. 침전은 왕과 왕비의 침소가 있는 곳으로 왕과 왕비의 사적인 생활 공간이다. 임금의 침전인 대전이 강녕전이고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이 교태전이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특이하게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는 지붕 한가운데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로 원래 조금 높게 처리한다. 그런데 강녕전과 교태전은 이 용마루를 없애 지붕 한가운데가 좀 꺼진 듯한 느낌이 든다. 강녕전과 교태전, 즉 왕과 왕비의 침전에 용마루를 올리지 않은 까닭은 정확치 않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침전은 지상의 용인 왕이 머무는 곳이자 또 다른 용인 왕자를 잉태하는 곳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기운을 가로막는 용마루를 없앴다는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1) 강녕전(康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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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강녕전]

향오문을 지나면 바로 강녕전이 나온다. 강녕전(康寧殿)은 임금의 침소로 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공간이다. 이 강녕전 영역은 가장 큰 건물인 강녕전이 있고 강녕전 주위로 네 채의 작은 건물들이 있다. 모두 다 왕의 침전으로 가장 큰 강녕전을 대침(大寢)이라 부르고 작은 침전들을 소침(小寢)이라 부른다. 이 강녕전을 대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녕전은 임금의 침소답게 격식을 갖추고 있어 건물 앞에 넓은 월대를 만들었다. 강녕전은 태조가 처음 경복궁을 창건할 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했고, 고종 때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강녕전 건물을 헐어 창덕궁 복원에 사용하면서 해체되었다. 그후 1965년 경복궁의 1차 복원 때 지은 건물이 현재의 강녕전이다.

2) 교태전(交泰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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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강녕전]

강녕전 뒤의 양의문(兩儀門)을 지나면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交泰殿)이 나온다. 이 왕비의 처소가 궁궐에서 가장 깊숙하게 감춰진 곳이라 하여 이를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비는 궁궐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아 주로 이 교태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므로 왕비를 위해 교태전 영역은 경복궁에서 가장 세심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담장에도 곱게 꽃 문양을 넣어 꾸몄고 문살도 다른 전각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형태이다.
교태전은 태조 때는 없었다고 한다. 1330년(세종 2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때 다시 세웠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철거되었다. 교태전 역시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철거하고 그 목재를 창덕궁으로 날랐던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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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아미산]

교태전 뒤쪽에는 아미산이라 불리는 화단이 있다. 이 공간이 오직 왕비만을 위한 후원이다. 아미산은 크게 석축으로 층을 쌓고 층층이 나무를 심고 석물을 가져다 놓았다. 이런 석축을 화계(花階)라 하는데 우리나라 궁과 사대부가의 전통 정원 방식이다. 아미산은 중국에 있는 아름다운 산의 이름인데, 이 산의 이름을 따서 교태전의 후원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경회루의 방지를 조성하며 거기에서 나온 흙으로 아미산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처음 아미산을 본 사람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단순해서 과연 왕비의 후원이 이 정도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미산 화계에 솟아 있는 굴뚝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미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아미산 굴뚝은 우리나라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으로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굴뚝은 모두 네 개로 전부 육각기둥 형태이며, 기둥의 각 면에 십장생과 봉황, 귀면, 당초문양 등의 무늬가 섬세하게 들어 있다.

6. 자경전과 동궁 영역

1) 자경전(慈慶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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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자경전 꽃담]

아미산에서 중앙 통로 쪽 작은 문을 나서면 북동쪽으로 예쁜 담장이 보인다. 이 담장 너머가 자경전이다.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신정왕후를 위한 거처로 세운 전각이다.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신정왕후는 익종의 비로 신정왕후라는 이름보다 조대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익종은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임금이 되지는 못했다. 뒷날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헌종의 뒤를 이어 철종마저 젊은 나이에 죽자,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해 왕위에 앉혔다. 이 사람이 바로 고종이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조대비가 한없이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조대비를 위한 공간인 자경 전을 따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세웠던 자경전은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888년에 새로 중건한 건물이다. 자경전은 가운데가 툭 튀어나온 독특한 형태의 건물로, 가운데 돌출부를 청연루라 하는데 이는 건물에 딸린 누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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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 십장생굴뚝]

자경전 역시 대비의 거처이므로,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여성적인 우아함이 돋보이는 곳이다. 우선 담장부터가 다른 전각들과는 다르다. 담장 중간중간에 예쁜 꽃 문양이 들어 있어 이 담을 자경전 꽃담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경전의 백미는 역시 보물 제810호로 지정된 십장생굴뚝이다. 자경전 뒤쪽으로 가면 굴뚝을 한 곳으로 모아 담장처럼 만들었는데, 이 굴뚝 담장에 십장생 무늬가 들어 있다. 아마도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2) 동궁(東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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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동궁전]

자경전의 남쪽이자 편전의 동쪽에 세자의 거처인 동궁 영역이 있다. 세자는 다음 세대의 임금이므로 뜨는 해와 같다 하여 동쪽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세자의 거처를 동궁(東宮)이라 불렀다. 동궁 일원은 일제시대에 모두 철거되었다가 1999년에 이르러야 복원되었다. 현재 동궁에는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복원되어 있다. 자선당은 세자가 거처하던 공간으로 임금의 침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비현각은 공부도 하고 정무도 보던 임금의 편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동궁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건물도 많았다. 고종 때 제작된 경복궁 시설도인 북궐도(北闕圖)를 보더라도 다른 전각들이 많다. 세자가 백관에게 조회를 받던 계조당, 세자가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머물던 계방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음식을 만들던 소주방과 세자와 세자빈의 시중을 들던 궁녀들이 거처하던 공간까지 모두 동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 향원정 영역

자경전에서 북쪽으로 작은 문을 통과해 담장을 지나면 아늑한 숲길이 나온다. 이 길이 향원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원래 이 길의 동쪽으로는 후궁 영역이었다고 한다. 임금의 후궁들이나 궁녀들이 거처하고 또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북궐도에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모두 철거되고 지금은 함화당과 집경당만 복원되어 있다.

1) 함화당과 집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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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함화당과 집경당]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경연을 열거나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공간이다. 그러나 과거 조선시대 때 용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일대가 조선시대에는 후궁들이 머물던 후궁 영역이라 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로 최근에 다시 복원했다.

2) 향원정(香遠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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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향원정]

향원정(香遠亭)은 향원지 연못 한가운데 있는 둥근 섬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향원지는 경회루가 있는 방지보다 규모가 작고, 연못 가장자리를 자연석으로 쌓아 더 부드러운 느낌이다. 그러나 향원지가 방지보다 훨씬 아늑해 보이는 것은 역시 향원정이라는 정자 때문이다. 경회루는 웅장하고 남성적이지만 이 향원정은 우아하고 여성적이다. 향원정은 이층 육각정자로 멀리서 보기에도 균형미가 완벽한 아름다운 정자이다. 게다가 주변의 소나무들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향원정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또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취향교(醉香橋) 역시 여성적인 나무 다리로, 수줍은 듯 살짝 아치를 이루는 홍예교다. 이 취향교와 어우러진 향원정의 풍경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선경이라 할 수 있다. 향원정(香遠亭)이란 이름이 향기가 멀리까지 퍼진다는 의미이고, 취향교(醉香橋)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이니 이름에서도 운치가 가득 묻어난다.
원래 향원정이 있던 자리는 취로정이란 정자가 있던 자리라 한다. 세조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고 취로정이란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후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한 다음 고종이 건청궁을 새로 지으면서 향원지와 향원정을 만들었다. 건청궁이 향원정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취향교가 향원정의 북쪽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 때 건청궁이 철거되고 또 6.25 전쟁 때 취향교마저 파괴된 뒤, 향원정 일대를 복구하면서 취향교를 남쪽으로 놓아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당시에는 건청궁이 복원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굳이 다리를 북쪽으로 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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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원지 열상진원]

이 향원지로 들어오는 물은 향원지 북서쪽에 있는 열상진원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열상진원(冽上眞源)에서 나온 물은 직접 향원지로 흘러들게 하지 않고, 석조물 가운데로 물길을 만들어 두 번을 직각으로 꺽이게 한 후에 향원지로 흘러든다. 이는 이 샘의 물이 워낙 차서 물의 온도를 좀 높이고 또 물의 흐름이 연못에 비친 풍경을 흔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

3) 건청궁(乾淸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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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건청궁]

향원지 북쪽에는 단청을 입히지 않은 새 전각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건청궁이다. 건청궁(乾淸宮)은 고종이 직접 세운 전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주로 머물던 곳이다. 고종은 즉위 10년만에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폐지하고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물론 조정 대신들도 모르게 세운 건물이 건청궁이다. 그 뒤 건청궁 공사가 알려지게 되자 조정 대신들이 공사를 반대했지만 고종은 끝내 이 건청궁을 완공하여 명성황후가 이곳에 거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건청궁은 조선 말 최대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일본 낭인들이 이곳 건청궁까지 침입해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그 뒷산에서 시신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이 저질러진 곳이다.
그리고 이 건청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를 사용했던 건물이기도 하다.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자사의 전구를 홍보하기 위해 동양 최초로 이곳에서 전구로 불을 밝혔다고 한다. 건청궁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해 놓았다.

4) 집옥재(集玉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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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집옥재]

건청궁의 서쪽으로 집옥재가 있다. 집옥재(集玉齋)는 ‘옥을 모아 놓은 집’이라는 의미처럼 고종이 서고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책을 옥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 집옥재는 한눈에 보기에도 중국풍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종이 중국의 건축 기술자를 불러다가 지었다는 말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집옥재는 동쪽의 협길당(協吉堂) 그리고 서쪽의 팔우정(八隅亭)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다. 팔우정과 협길당이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건물인데 비해 가운데 집옥재가 중국풍의 건물이어서 왠지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 집옥재는 본래 창덕궁에 있던 건물이라 한다. 고종이 창덕궁에 집옥재와 협길당, 팔우정을 세웠는데 1888년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또 집옥재의 현판 글씨는 송나라의 명필로 알려진 미불 주원장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집옥재 서쪽으로는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이 문을 나서면 청와대 앞길로 나가게 된다. 이 집옥재가 있던 자리는 과거에 청와대를 경비하던 부대가 있던 자리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신군부 세력이 이곳에서 군사 쿠데타를 모의하여 12.12 사태를 일으킨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5) 태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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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태원전]

1868년 흥선대원군이 경북궁을 중건할 때 건립된 건물로 태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이다. 이 서북쪽의 건물들은 주로 빈전(殯殿, 왕실 사람이 죽었을 때 관을 모셔두던 빈소)이나 혼전(魂殿, 임금이 죽었을 때 종묘로 모시기 전 2년간 위패를 모시는 곳), 영전(靈殿, 돌아가신 조상의 위패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등 왕실의 망자와 관련된 공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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