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경복궁은 크고 작은 화재를 겪다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몽진하자 백성들의 의해 불타 버렸다. 창건한 지 200년이 채 안 된 정궁이 불타 없어진 것이다. 그후 경복궁은 273년간 그대로 방치되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이 시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강력히 추진해 1868년 6월 마침내 경복궁 중건을 완성했다.
그러나 조선말 외세의 세력에 흔들리던 조선은 1895년 10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당했다. 그러자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들어가 집무를 보았던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후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에서 나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들어감으로써 경복궁은 궁으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5년 일본은 조선 통치 5주년을 기념해 ‘시정오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며 경복궁 철거를 시작해 경복궁이 본 모습을 잃고 말았다. 현재의 경복궁은 최근에 복원사업을 진행해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태이다.
1. 광화문 영역
경복궁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영역이 바로 정문인 광화문과 중문인 흥례문이다. 이 영역을 광화문 영역으로 구분해 정리했다.
1) 광화문(光化門)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으로,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이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보다 크고 화려하다. 현재 광화문은 제 자리로 옮겨지는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2) 흥례문(興禮門)
[경복궁 흥례문]
광화문을 지나면 바로 흥례문이 나온다. 흥례문은 궁성 정문인 광화문과 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라 할 수 있다.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을 세웠던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졌다.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이름을 지었는데, 당시 이름은 흥례문이 아니라 홍례문(弘禮門)이었다고 한다.
그후 임진왜란 때 화재로 불 타 없어졌고 1867년(고종 4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당시 청나라 황제의 이름(弘歷 홍력)에 ‘홍(弘)’ 자가 있어 ‘홍(弘)’ 자를 피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흥례문 역시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3) 영제교(永濟橋)
[경복궁 영제교 : 영제교 뒤에 보이는 문이 근정문이다]
흥례문을 지나면 동서로 가로지르는 물길이 나온다. 이 물길이 금천(錦川)이다. 금천은 궁에 드는 사람이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끗이 씻으라는 의미가 있다. 이 금천을 건너는 다리를 보통 금천교(錦川橋)라 하는데 경복궁에서는 금천교라 부르지 않고 영제교(永濟橋)라 한다.
[영제교 옆 천록]
경복궁의 금천은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근정문 앞으로 돌려 만든 것이라 한다. 영제교 옆 금천 축대에는 기괴한 형상의 동물들이 금천을 쳐다보고 있다. 이 동물 역시 상상 속의 동물로 천록이라는 동물이라 한다. 이 동물은 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앞에서 사악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는 16마리의 천록이 있었다는데 현재는 4마리만 남아 있다.
2. 정전 영역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을 건너면 근정전이 나온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경복궁에서 가장 웅장하게 꾸며졌다. 정전(正殿)은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의 사신 영접 또는 법령을 반포하거나 큰 양로연(養老宴)을 여는 등 국가적인 큰 행사 때 사용되는 전각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는 건물이다.
1) 근정문(勤正門)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이 있다. 정전 공간은 사방으로 행각을 둘렀는데 남쪽 행각의 가장 큰 문이 근정문이다. 이 근정문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고 평소에는 열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근정문 양쪽의 작은 문인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통해 출입했는데, 문반들은 동쪽에 있는 일화문을 무반들은 서쪽에 있는 월화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때로 이 근정문 앞에서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금천을 기준으로 정3품 이상의 고위직은 금천 안쪽에 자리하고 그 이하의 하위직들은 금천 밖에 서서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2) 근정전(勤正殿)
[경복궁 근정전]
근정전은 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큰 전각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세운 건물로 국보 제223호이다. 이 건물은 태조 때 세워진 건물과는 좀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근정전은 넓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이 기단을 월대(月臺)라 부르며 아래쪽을 하월대, 위쪽을 상월대라 한다. 이렇게 넓고 높은 2층 기단을 놓은 것은 근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다. 월대는 두 층 모두 돌로 난간을 두르고 난간과 난간이 만나는 모서리(이를 문로주 또는 엄지기둥이라 한다)에는 12지신상을 만들어 올렸다. 돌난간은 팔각으로 다듬었으며, 하엽동자라 불리는 괴임돌이 돌난간을 받치고 있다. 하엽 동자는 그 모양이 연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찰에서도 난간 받침으로 많이 쓰이는 형태다.
[경복궁 근정전 내부]
월대 위에 서 있는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이층 건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밖에서 보기엔 이층이지만 내부는 위 아래가 트인 단층 구조로 시원하고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정면 끝에 임금의 자리인 사각형의 어좌(御座)가 있고, 어좌 뒤에는 임금의 상징인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일월오봉도라 하기도 하며, 일월오악도를 그린 병풍을 일월오악병이라 한다)를 그린 병풍이 있다. 어좌 위에는 화려한 닫집(보개寶蓋라고도 함)을 만들었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 칠조룡]
또 근정전의 천장 중앙에는 칠조룡(七爪龍) 두 마리를 그렸다. 칠조룡은 발이 일곱인 용으로 황제의 상징이라 한다. 과거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이 그려져 있었으나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칠조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3) 조정(朝廷) 삼도(三道) 품계석(品階石) 답도 (踏道) 회랑(廻廊)
[경복궁 조정과 근정전]
근정전 앞의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한다. 보통 조정 대신이라 부를 때의 조정이 바로 이 조정을 말한다. 조정은 얇고 넓은 박석을 깔아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조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정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인 삼도이다. 삼도는 근정
문에서 근정전 월대 아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가운데가 양쪽보다 조금 높다. 이 가운데 높은 길이 임금이 다니는 어도이며, 신하들은 양쪽의 낮은 길로 다녀야 했다.
이 삼도의 양쪽으로 나란히 품계석이 놓여 있다. 맨 앞의 정1품부터 마지막 정9품까지 품계가 새겨진 표지석이다. 근정전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관료들이 자신의 품계에 따라 서야 할 위치를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이때 동쪽에는 문신(문반)이 서고 서쪽에는 무신(무반)이 섰는데, 이 위치에 따라 문반을 동반, 무반을 서반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 이 둘을 합쳐 양반이라 불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답도 : 계단 가운데 네모난 돌이 답도이다]
삼도가 끝나는 월대 아래에서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는 사각형의 돌에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부분을 답도라 한다. 삼도 중앙의 높은 길을 걸어온 왕은 이 답도에서는 가마를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신하들은 답도 양쪽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봉황은 용과 함께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또 조정의 박석을 잘 살펴보면 바닥의 박석 위에 쇠고리(차일고리라고도 함)가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쇠고리는 근정전 기둥 위 창방에도 고정되어 있다. 이는 조정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비나 햇볕을 막기 위한 차일을 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 쇠고리에 굵은 줄을 묶어 차일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회랑(廻廊)은 정전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있는 통로이다. 이 회랑을 만들어 임금이 비를 피해 움직일 수 있게 하고 또 근정전의 품격을 높였다. 본래 태조 때 처음 근정전을 세울 때는 회랑이 아니고 행각(行閣)이었다고 한다. 행각은 회랑을 막아 방이나 창고처럼 사용했던 공간을 말한다. 초기에는 이 행각을 창고로 쓰거나 관리들의 사무실로 쓰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이를 회랑으로 고쳤다고 한다.
4) 정과 드므
[정과 드므 : 왼쪽이 정이고 오른쪽이 드므이다]
월대에는 드므와 정이 있다. 하월대의 난간 옆에는 방화수통처럼 생긴 무쇠솥이 있는데, 이를 드므라 한다. 드므는 화재를 방지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드므에는 물을 채워 놓는데, 불귀신인 화마(火魔)가 찾아왔다가 드므의 물에 비친 자신의 융칙한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옛날 궁궐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화재였다. 화재를 예방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불이 났을 때 이 드므에 담긴 물이 방화수 역할도 했을 것이다.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라 한다.
상월대의 모서리 부분에는 큰 향로 모양의 정(鼎)이 있다. 이 정(鼎)이 실제 향로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궁에서의 정은 통치자의 상징이라 한다. 고대 중국의 하나라 때 지방의 아홉 제후들이 순 임금과 우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각각 정(鼎)을 하나씩 바쳤다고 한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정(鼎)이 통치자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근정전 상월대에 있는 정(鼎)은 근정전의 주인인 임금이 통치자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3. 편전 영역
정전 영역을 다 돌아본 뒤에는 편전 영역으로 가게 된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思政門)을 지나면 바로 편전 영역이다. 편전(便殿)은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며 국정을 돌보는 곳으로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이다. 정전은 궁을 대표하는 건물이긴 하지만 큰 행사 때나 쓰였고, 임금의 일상적 집무는 이 편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아침마다 조회를 열고 경연을 하고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방문객을 맞는 등의 일이 모두 편전에서 이루어졌다. 경복궁의 편전은 중앙에 중심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을 두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보조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을 두었다. 태조 때는 사정전만 있었고 세종 때 만춘전과 천추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후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사라졌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복원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1) 사정전(思政殿)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은 편전 영역의 중심 건물이다. 태조 때 처음 지었을 때는 보평전(報平殿)이라 불렀는데, 세종 때 보조 편전인 만춘전과 천추전을 지으면서 사정전(思政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정전(思政殿)이란 이름은 늘 바른 정치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사정전은 중심 편전답게 좌우의 보조 편전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사정전 운룡희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근정전과 같이 전돌을 깔았던 것을 조선 말에 마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정전 안의 정면에는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는 임금의 상징인 일월오악도가 있다. 또 일월오악도 위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이 있다. 은은하면서도 힘찬 그림인데 이 그림이 운룡희주(雲龍喜珠)라는 그림으로 구름 속에서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논다는 뜻이다.
2)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
[경복궁 만춘전]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사정전의 보조 편전이다. 사정전은 중심 편전이긴 하지만 온돌, 즉 난방시설이 없다. 대신 만춘전과 천추전에 온돌을 깔아 난방 시설을 해놓고 추운 계절에는 만춘전이나 천추전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경복궁은 동쪽을 봄에 그리고 서쪽을 가을에 비유한 이름이 많다.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이 봄을 의미하고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가을을 의미한다. 보조 편전 역시 동쪽에 있는 것이 만춘전(萬春殿)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천추전(千秋殿)이다.
이 두 건물은 세종 때 처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지고,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다시 지금의 형태로 세워졌다. 그후 만춘전은 6.25 전쟁 때 폭탄을 맞아 소실되었던 것을 1988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두 건물은 똑 같은 형태로 세워졌는데 임금의 집무실이라기엔 너무 단출해 보일 정도로 소박하다.
3) 천자고(天字庫)
[경복궁 천자고]
편전 영역의 정면, 즉 사정문 앞으로는 긴 행각(行閣)이 이어진다. 행각의 이름이 서쪽부터 천자문의 순서인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을 따라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玄字庫), 황자고(黃字庫)…로 정해져 있다. 이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그저 순서를 나열한 것뿐이다. 옛날에서는 가, 나, 다, 라… 식의 순서를 천자문의 순서대로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으로 순서를 나열했다고 한다. 이 행각은 창고로 쓰이던 곳이라 한다. 도서관으로 쓰였다는 말도 있고, 활자를 보관하던 곳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임금의 집무 공간 바로 앞에 있는 행각이니 아마도 임금에게 자주 소용되는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했을 것이다.
'詩, 詩調. 童詩, 漢詩 > 역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백년전 고적사진 보기 (0) | 2010.12.01 |
|---|---|
| 경복궁탐방자료2 (0) | 2010.11.22 |
| 창경궁 탐방자료 (0) | 2010.11.20 |
| 창덕궁 자료 (0) | 2010.11.17 |
| 창덕궁자료1 (0) | 2010.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