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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탐방자료

무너미 2010. 11. 20. 16:45

창경궁(昌慶宮)은 성종 14년(1483년)에 세운 이궁으로,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창경궁 자리는 원래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였다. 수강궁은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부왕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다. 당시 세종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바로 옆에 부왕이 머무는 수강궁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이 죽자 수강궁은 비게 되었고 세종도 경복궁으로 이어함으로써 수강궁은 쓰임새를 잃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단종이 수강궁에 머물렀고 세조가 수강궁에서 승하했다고 한다.
그후 성종이 세조비인 정희왕후와 예종비인 안순왕후 그리고 덕종비인 소혜왕후, 이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다시 고쳐 지으며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등을 세우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명정전 등 정전을 갖춘 궁이지만 실제로 임금의 집무와 생활을 위한 궁이라기보다는 대비들을 위한 별궁의 의미가 큰 궁이라 할 수 있다. 또 조선의 궁 중 유일하게 동향을 하고 있는 궁이기도 하다.

그후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에 타 사라졌던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복원했다. 그 이후로 경복궁이 복원되는 고종 때까지 임금들은 창덕궁에서 집정했고, 창경궁은 세자나 대비 또는 후궁들이 머무는 궁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 때와, 순조 30년(1830년)에 큰 화재가 있었다. 그러나 곧 다시 지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일제강점기 때인 순종 3년(1909년) 일본인들이 창경궁의 건물을 헐고 이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4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창경궁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무고의 옥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꼽을 수 있다. 숙종 27년(1701년)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들여 인현왕후를 기원하다가 사약을 받은 곳이 창경궁의 취선당이며, 영조 41년(1762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곳이 창경궁 선인문 안뜰이다. 또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이곳 창경궁에 잠시 유폐되었다가 강화의 교동으로 귀양을 갔다고 한다.

 1. 홍화문(弘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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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성종 15년(1484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다시 세웠다. 그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으나 광해군 때 세워진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문루이다. 전형적인 궁의 정문 형태로 우진각지붕이며 보물 제384호이다.

2. 옥천교(玉川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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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옥천교]

홍화문을 지나면 바로 옥천교가 나온다. 궁은 정문이나 중문 앞 또는 뒤에 물길을 만드는데 이 물을 금천(錦川) 또는 명당수(明堂水)라 한다. 이 자리에서 궁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씻으라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창경궁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가 옥천교이다. 다리 아래의 두 홍예가 겹치는 자리에 귀면을 조각해 놓았고 다리 양끝에는 해치라는 전설 속의 동물을 깍아 놓았다. 성종 14년(1483년)에 만들었으며, 보물 제386호이다.

3. 명정문(明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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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명정문]

옥천교를 건너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정문이자 창경궁의 중문 역할을 하는 명정문이 나온다. 명정문 양쪽으로는 명정전을 둘러싼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명정문은 명정전의 정면 중심축에서 남쪽으로 조금 비껴서 있다. 명정문과 행각은 보물 제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4. 명정전(明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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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던 건물로 국보 제226호이다. 성종 15년(1484년) 처음 세웠고 임진왜란 때인 1592년과 순조 30년(1830년)에 불에 탔으나 순조 34년(1834년)에 중건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이 보수를 거치며 현재까지 남아 있어,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정전이 바로 명정전이다.
명정전 역시 큰 이중 월대 위에 앉아 있다. 그러나 명정전의 월대는 정면과 북쪽면 일부만 이중이고 나머지는 단층이다. 명정전은 단층 건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이는 창경궁이 정궁이 아닌 이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명정전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사각형의 어좌(御座)가 있고, 어좌 뒤에는 임금의 상징인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일월오봉도라 하기도 한다)를 그린 병풍이 있으며, 어좌 위에는 화려한 닫집(보개寶蓋라고도 함)을 만들었다.

※ 정과 드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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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과 드므]

월대에는 드므와 정이 있다. 하월대의 난간 옆에는 방화수통처럼 생긴 무쇠솥이 있는데, 이를 드므라 한다. 드므는 화재를 방지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드므에는 물을 채워 놓는데, 불귀신인 화마(火魔)가 찾아왔다가 드므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옛날 궁궐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화재였다. 화재를 예방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불이 났을 때 이 드므에 담긴 물이 방화수 역할도 했을 것이다.
상월대의 모서리 부분에는 큰 향로 모양의 정(鼎)이 있다. 이 정(鼎)이 실제 향로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궁에서의 정은 통치자의 상징이라 한다. 고대 중국의 하나라 때 지방의 아홉 제후들이 순 임금과 우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각각 정(鼎)을 하나씩 바쳤다고 한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정(鼎)이 통치자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근정전 상월대에 있는 정(鼎) 역시 근정전의 주인인 임금이 통치자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경복궁 탐방 자료 1 참조)

※ 조정과 품계석

궁의 정전 앞의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한다. 조정은 얇고 넓은 박석을 깔아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조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정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인 삼도이다. 삼도는 근정문에서 근정전 월대 아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가운데가 양쪽보다 조금 높다. 이 가운데 높은 길이 임금이 다니는 어도이며, 신하들은 양쪽의 낮은 길로 다녀야 했다.
이 삼도의 양쪽으로 나란히 품계석이 놓여 있다. 맨 앞의 정1품부터 마지막 정9품까지 품계가 새겨진 표지석이다. 근정전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관료들이 자신의 품계에 따라 서야 할 위치를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이때 동쪽에는 문반이 서고 서쪽에는 무반이 섰는데, 이 위치에 따라 문반은 동반, 무반을 서반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 이 둘을 합쳐 양반이라 불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삼도가 끝나는 월대 아래에서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부분을 답도라 한다. 계단은 답도 양쪽에 있다. 봉황 역시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이 계단을 오르면 임금을 만난다는 의미다.
또 조정의 박석을 잘 살펴보면 바닥의 박석 위에 쇠고리(차일고리라고도 함)가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쇠고리는 근정전 기둥 위 창방에도 고정되어 있다. 이는 조정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햇볕을 막기 위한 차일을 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 쇠고리에 굵은 줄을 묶어 차일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경복궁 탐방 자료 1 참조)

5. 문정전(文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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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은 명정전 남쪽에 자리한 건물로, 임금이 평소에 집무실로 사용하던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6. 숭문당(崇文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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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숭문당]

숭문당은 명정전 뒤편에 있는 건물로 이 건물 역시 순조 때 소실되었던 것을 바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의 현판인 ‘崇文堂’과 ‘日監在玆’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라 한다. 영조는 이 숭문당에서 성균관의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주연을 베풀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7. 빈양문(賓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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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양문 회랑]

숭문당 옆의 문으로 왕의 업무 공간인 외전과 왕실의 생활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문을 나서면 내전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8. 함인정(涵仁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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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함인정]

빈양문을 나서면 함인정이 나온다. 이 함인정은 영조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 자리에는 인양전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뒤 인조 11년(1633년)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옮겨와 함인정이라 이름 붙였다.

9. 경춘전(景春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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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경춘전]

경춘전은 왕비나 세자빈이 머물던 건물로 이곳에서 정조와 헌종이 태어났다고 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건물이기도 하다. ‘景春殿’ 현판은 순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10. 환경전(歡慶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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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환경전]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던 건물로 알려져 있다. 중종과 소현세자 그리고 익종(효명세자)가 이 환경전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죽었을 때는 익종의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 때 명성황후가 궁을 빠져나가 행방이 묘연할 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서거를 선언하고 빈전을 차렸던 곳도 이곳 환경전이다.

11. 통명전(通明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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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전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주로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다. 건물 서쪽으로 작은 연못을 만들고 그 뒤로 화계를 꾸며 왕비를 위한 공간을 꾸몄다. 내전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2. 양화당(養和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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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양화당]

통명정 동쪽에 있는 건물로 통명전보다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통명전과 함께 창경궁 내전의 중요 건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던 인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이곳 양화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창덕궁이 파손되어 어쩔 수 없이 임금이 이곳 양화당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리고 고종 15년(1878년) 철종 비 철인왕후가 이 양화당에서 승하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격하되었을 때는 창경원 관리사무소로 쓰였던 건물이다. 본래 주변에 연경당과 연희당 등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13.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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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과 집복헌은 후궁들의 처소로 쓰이던 건물로 다른 건물에 비해 소박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특히 집복헌에는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와 정조의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가 거처하면서 각각 사도세자와 순조를 낳은 곳이다. 정조는 수빈 박씨를 총애하여 집복헌 옆의 영춘헌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고 이곳에서 승하했다고 한다.

14. 풍기대(風旗臺)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측하는 기구이다. 긴 돌이 풍기대이고 이 풍기대에 풍기죽이라는 장대를 꽃고 그 장대에 깃발을 달아 깃발의 흔들림을 보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관측했다. 이곳의 풍기대는 영조 8년(1732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846호로 지정되어 있다.

15. 성종 태실(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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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태실]

태실이란 왕가의 자손이 태어나면 그 아기의 태를 잘 모셔 놓은 곳을 말하며 태봉(胎封)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실 아기의 태는 깨끗이 씻어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감싼 후 작은 항아리에 넣은 다음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아 태봉지를 선정하여 이곳에 묻었다. 그리고 태실 자리에는 석실을 만들고 태실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전국 각지에 왕가의 태실지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태실의 모두 발굴해 현재 서삼릉 자리에 모아 놓았다. 그때 유독 성종의 태실만 이곳 창경궁에 이전해 놓은 것이다. 해방 후 서삼릉의 태실을 다시 발굴해 보니 태를 보관한 항아리들이 일부 교체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종 태실은 석종형의 태실을 만들고 팔각의 지붕돌을 얹은 뒤 팔각 난간을 둘러 놓았다.

16. 춘당지(春塘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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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춘당지]

춘당지는 창경궁의 후원 연못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못은 후원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연산군이 전국의 미녀를 뽑아 이곳에서 여흥을 즐기기 위해 서총대라는 축대를 쌓고 그 앞에 연못을 팠는데 그 연못이 바로 춘당지다.
현재의 춘당지는 호리병 모양으로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원래의 춘당지는 작은 연못만 춘당지였고 큰 연못이 있던 자리는 내농포라 불리던 임금의 권농장이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궁 안에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키워 백성들의 애환을 직접 느끼고 농사의 길흉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권농장까지 연못으로 만들어 배를 띄워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17. 팔각칠층석탑

춘당지에 있는 탑으로 보물 제1119호이다. 이 탑은 우리나라의 탑이 아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만주의 상인에게 구입하여 세워 놓은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는 탑으로 중국에서 1470년에 제작된 탑이라 하는데 조형미가 떨어지고 섬세한 맛도 덜한 탑이다.

18. 식물원
식물원.jpg 일본인들이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꾸미면서 만든 식물원이다.















19. 관덕정(觀德亭)
관덕정.jpg 왕이 활을 쏘던 활터이다. 예기에 나오는 글 중에 ‘활 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덕을 알 수 있다’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으로 활터 정자에 주로 관덕정이란 이름을 붙인다. 창경궁에서 가장 울창하게 숲을 이룬 곳이 이 관덕정이다.











20. 관천대(觀天臺)
관천대.jpg 조선 숙종 14년(168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물 제851호이다. 관천대는 천체를 관측하던 곳으로 이 관천대 위에 간의나 혼천의 등을 놓고 천체를 관측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서운관이란 관청을 두어 천체를 관측했는데 조선 세종 때 다양한 천체 관측기구를 발명하면서 이를 관상감으로 고쳤다. 이 관상감의 관리들이 밤이면 이곳에서 천체의 운행을 관측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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