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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시] 와유(臥遊)

무너미 2012. 11. 2. 06:35

 

 

[가슴으로 읽는 시] 와유(臥遊)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 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하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어다 보며 홀로 국화 술에 취하리.

                                                                        -안현미(1972~     )

 

 

찬 가을비가 내리는 저물어가는 저녁이다. 따스하게 난로를 켜놓고 가을비를 내다보고 있다. 물든 단풍잎들을 떨구고 있는 나뭇가지는 옛 한지에 긋는 애틋한 필획(筆劃)처럼 정갈하고 다정히 저녁 하늘에 번져간다. 이 순간을 같이하고 싶은 지음(知音)이 있으나 지금 여기 없다. 국화에 가을비 스치듯 안타까울 뿐 그는 없다. 그 그리움은 버릴 수 없는 것이어서 내년 이맘때가 되어도 여전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내년의 내 맘을 들여다본다.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놓치고가 아니라!)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여전히 내년 가을비에도 그리울 테지만, '지난해 다녀갔다'고… 묻어놓은 '앙탈'이 이 시의 울림이고 웃음이고 회한이다. 조선 여류(女流)의 옷고름이 얼핏 스친다.

 

사족으로 한 말씀 더한다. 육필(肉筆)이 사라져간다. 자기 글씨를 가꾸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육필에 어른어른 묻어나는 심미(審美), 그런 것은 몰라도 되는 것이 '모더니즘'일까? 우스운 일이다. (조선일보 11월 2일)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