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調. 童詩, 漢詩/가슴으로 읽는 시조

현관이 너무 넓어

무너미 2013. 2. 16. 05:08

 

 

[가슴으로 읽는 시조] 현관이 너무 넓어

 

현관이 너무 넓어

 

현관 가득 너무 어지러운 신발

곶은 꽃도 푸짐 했네

 

바람 불고 비 뿌리고

별자리 옮겨가고

 

하나씩 낙화는 지는데

외로 놓인 혼자 신발

 

여느 때는 좁아서 지쳤고

이제는 넓어서 우네

 

저만치 입을 벌린 채

혼자 앉은 항아리며

 

또 한철 목련은 이울고

돌아오지 않은 밀물

 

                     - 이일항(1930~      )

 

 

현관은 그 집의 세(勢)를 보여주는 곳이다. 식구(食口)며 살림 등이 드러나는 문간이니 말이다. 지금은 문을 열어봐야 그 집의 속내를 짐작하지만, 예전에는 바깥에서도 웬만큼 알 수 있었다. 그 집 식구가 많은지 적은지, 손님이 잦은지 그렇지 않은지, 열어놓은 대문 사이로 훤히 뵈는 봉당의 신발에서 넘겨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설에 고향의 현관들은 모처럼 부듯했을 것이다. 그것도 잠깐, 현관에 가득했던 '어지러운 신발'들은 곧 자신의 삶터로 돌아가니 남은 신발들만 '바람 불고 비 뿌리고/ 별자리 옮겨'간 시간을 되새기고 있으리. 고향의 훈김 묻혀온 신발들로 부산한 도시의 현관 중에도 '외로 놓인 혼자 신발'들은 '입 벌린 항아리'처럼 저녁을 또 하염없이 견딜 터. 그런 곳에 부디 흙강아지 신발들이 자주 닥치는 따뜻한 해를 빌어본다. 현관이 좁아서 지치도록.

정수자·시조시인

 

오늘의 좋은 글

연필처럼

연필은 쓰던 걸 멈추고 몸을 깎아야 할 때도 있어.

당장은 좀 아파도 심을 더 예리하게 쓸 수 있지.

너도 그렇게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해.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 파울로 코엘료 / 흐르는 강물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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