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조] 현관이 너무 넓어
현관이 너무 넓어
현관 가득 너무 어지러운 신발 곶은 꽃도 푸짐 했네
바람 불고 비 뿌리고 별자리 옮겨가고
하나씩 낙화는 지는데 외로 놓인 혼자 신발
여느 때는 좁아서 지쳤고 이제는 넓어서 우네
저만치 입을 벌린 채 혼자 앉은 항아리며
또 한철 목련은 이울고 돌아오지 않은 밀물
- 이일항(1930~ )
현관은 그 집의 세(勢)를 보여주는 곳이다. 식구(食口)며 살림 등이 드러나는 문간이니 말이다. 지금은 문을 열어봐야 그 집의 속내를 짐작하지만, 예전에는 바깥에서도 웬만큼 알 수 있었다. 그 집 식구가 많은지 적은지, 손님이 잦은지 그렇지 않은지, 열어놓은 대문 사이로 훤히 뵈는 봉당의 신발에서 넘겨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설에 고향의 현관들은 모처럼 부듯했을 것이다. 그것도 잠깐, 현관에 가득했던 '어지러운 신발'들은 곧 자신의 삶터로 돌아가니 남은 신발들만 '바람 불고 비 뿌리고/ 별자리 옮겨'간 시간을 되새기고 있으리. 고향의 훈김 묻혀온 신발들로 부산한 도시의 현관 중에도 '외로 놓인 혼자 신발'들은 '입 벌린 항아리'처럼 저녁을 또 하염없이 견딜 터. 그런 곳에 부디 흙강아지 신발들이 자주 닥치는 따뜻한 해를 빌어본다. 현관이 좁아서 지치도록. 정수자·시조시인
|
오늘의 좋은 글
연필처럼
연필은 쓰던 걸 멈추고 몸을 깎아야 할 때도 있어.
당장은 좀 아파도 심을 더 예리하게 쓸 수 있지.
너도 그렇게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해.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 파울로 코엘료 / 흐르는 강물처럼 -
'詩, 詩調. 童詩, 漢詩 > 가슴으로 읽는 시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필을 깎다. (0) | 2013.02.28 |
---|---|
묵계(默契) (0) | 2013.02.22 |
향일암 동백 (0) | 2013.02.05 |
휴(休) (0) | 2013.01.29 |
곰국 (0) | 2013.01.22 |